[전라도]“징글징글 엿을 하고 살았어”

| 2020-05-13 0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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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꽃 필 무렵
무안 어매들의 삶이야기 모음집

 <이 세상에서 제일 세고, 제일 강하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장한, 인생의 그 숱하고도 얄궂은 고비들을 넘어 매일 ‘나의 기적’을 쓰고 있는 장한 당신을 응원합니다. 이제는 당신꽃 필 무렵!>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회에 붙은 헌사다.
 “왜 나를 숭글 디가 없어 여기다가 숭궈 놨나” 싶은 돌밭에서 스스로 일어나 꽃이 된 어매들한테도 바치고 싶다.
 무안여성농어업인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어매들의 삶의 이야기를 옮겨 쓴 모음집 《시방은 암것도 안 무솨, 글자를 안께!》. 글자를 알기 전에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암것도 안 무솨’라는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왔고, 호강질(길)은 몰르고 고생질(길)로만 건너오면서도 발 디딘 자리에서 한사코 꽃을 피워내며, 가난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항꾼에 나누고 퍼주는 버르쟁이를 고치지 못한 어매들의 이야기다.
 강맹순 강영희 강정례 김고만 김단례 김연례 김옥금 김정순 김포접 김화엽 노정임 박삼녀 박은심 안덕심 안미순 유숙희 윤명애 윤연임 이경자 이백임 이삼임 이윤심 이현임 임춘금 전덕례 전정순 정광순 정매신 정정례 정춘심 주순례 최단임 최순례 최영자 김귀심 김옥자 김옥희 김순자 배대례 신금자.
 땡볕과 폭우와 거센 바람 속을 지나온 생애의 시간 속에서 핀 당신꽃들의 말씀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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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징글 엿을 하고 살았어”
김고만

 이름이 ‘고만’이다.

 “원래는 덕순이라 지었는디 우리 할무니가 딸 고만 나라고 ‘고만’이라고 부르다본께 그 이름이 되아불었어. 울 어매가 나 낳고나서 내 밑으로는 아들 셋 났어.”

 셋째 딸 김고만(73·해제면 만풍리 신만마을)은 열아홉에 시집왔다.
“온께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오는 초가집이여.”

 열아홉 살에 시집온 이래 이 터에서 주욱 살았다. 어매의 한평생이 여기 담겼다. 정갈한 손길이 구석구석 윤기나게 닿아있는 집. 금간 자리를 시멘트로 때운 오래된 항아리마저도 살뜰하게 건사해오고 있다.

“아들이 엿 퍼논 데다 손을 달팍 짚어불어”

 “나 시집온께 엿합디다. 이 동네가 엿을 많이 했어. 지금은 없어. 엿 맹글문 시어마니가 장으로 동네로 폴러댕기고.”

 짚가마니로 서른 개 마흔 개 되는 그 많은 서숙쌀을 엿으로 만들었다.

 “고놈을 다 엿을 해. 수숙(서숙)쌀을 당갔다가 건져서 도구통에 찌어. 가리로 만들어서 멧죽을 쒀. 그담에는 걸러서 몰국을 대리제. 죽이 되직해지문 부서. 식혀질만 하문 손으로 납작납작 늘이빼서 가위로 잘라. 옛날에는 그 엿 하나에 오원이었어. 그러코 해서 살림을 일우고 살았어.”
엿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었다.

 “우리 큰아들이 어느 날 학교 갔다 옴서 옛날에는 뭐 먹을 것이 없응께 솥단지 바닥에 눌어붙은 엿깜밥 주라고 우르르 달려옴서 엿 퍼논 놈에다 손을 달팍 짚어불어갖고 오매오매 엉겁김에 팔을 걷어본께 뼈만 남고 살이 익어갖고 다 빠져나가불고. 그래도 애기때라 큰께 그 숭제(흉터)가 다 없어집디다.”

 허나, 어매 맘 속에는 그 숭제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 뒤로는 엿 말만 들어도 징해붑디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은 엄중하고 절박하여 엿 만들기를 그만 할 수는 없었다.

 “엿을 맹글라문 무쟈게 불을 때야 돼. 그때는 나무나 있었가니. 낮에는 산감온다고 못한께 밤으로 식구 수대로 묏갓을 댕임서 더트고 댕김서 나무를 해다가 엿을 했제. 지금은 일도 없는 세상이여. 그때게다 대문. 산에서 쌩솔가지 껑꺼다가 불 때고 나문 저고리 소매가 시커매져불어. 그러케 징글징글 엿을 하고 살았어. 난중에는 연탄가리를 가마니로 사다가 주먹주먹 이겨갖고 쥐어서 마당에다 말래. 솔방울같이로 말려갖고 불을 땠제. 오매오매 그놈을 땐께 일이 한나도 없는 것 같이 좋더만.”
엿의 단맛이란 그렇게 온갖 쓴맛을 다 본 끝에 나오는 것이었다. 시집와서부터 시작한 엿 일은 어매가 마흔 몇 살 되도록 이어졌다.

“많이라도 믹였으문 덜 짠하까”

 “여가 갯바닥 끼고 있응께 일이 많애. 석화 주서다가 집에서 까갖고 팔러댕기고 생새우 사다가 장에 이고댕김서 폴고. 그래도 집에서 처백혀서 엿하는 것이 젤로 힘들어. 허라 해도 인자는 절대 못할 일이여.”
어매는 물도 한없이 귀한 세상을 겪어 나왔다.

 “샘물 질러다 항아리 항아리 가득 물 채와놓고 뚜껑 덮어노문 그것같이 옹골진 것이 없었어. 우리 신랑이 오형제 중에 장남이었는디 나 시집온께 막내가 시 살 묵었더만. 내가 키와서 여웠제. 그 시아재가 일곱 살 때나 됐으까. 물 다 질어다놓고 나서 애기 업고 나무를 해갖고 온께 정제서 물장난을 하고 있더라고. 냇가에서 붕애를 잡아다가 물 찰방찰방한 항아리 항아리에 한나한나 다 담아놨어. 오매 내가 놀래갖고 소리를 질른께 셋바닥을 낼름낼름함서 내빼더라고. 그때는 진짜 부애나더만.”
쌀밥 한 그릇도 눈물났다.

 “시아부지 밥을 담아줄라고 쌀 한주먹을 서숙쌀 위에 안섞어지게 가만히 영그문 밥하기도 얼매나 조심시로왔제. 쌀만 옴목 떠서 담아드리문 우리 아들이 밥을 안묵고 지달리고 있어. 한아부지가 밥 냉기문 묵을라고. 그런 중을 뻔히안디 한아부지가 어찌코 다 묵겄어. 항시 냉가서 손주를 줬제. 지금은 개도 쌀밥을 한나썩 보듬고 있어도 안묵는디 그때 그것을 생각하문 그러코 짠해. 많이라도 믹였으문 덜 짠하까.”

 그 자식은 어미보다 앞서 먼길을 가버렸다.

 “많이 살도 못하고 결혼식 일주일 냉가놓고 죽어불었어. 병이 나갖고 느닷없이. 해가 가고 달이 가고 그런께 조깨 잊어집디다. 그래도 식구들 다 모여도 항상 비제. 가득 차도 비어 있어. 아들 셋 딸 둘인디 하나가 그러코 가불었어. 살았으문 ㅤㅁㅔㅊ 살이겄다 하고 항상 나이가 헤아려지제. 나만 저끄는 것 같애도 이런 고통 당한 사람이 많애. 놈도 이런 고통을 저끔시롱도 아무도 몰르게 혼차 가심에 품고 달개고 살 것이다 그러고 살제.”

‘임질’로 천리길을 걸어댕기며 자식들을 키워낸 김화엽 어매.

“송애젓 무건 다라를 이고 천리길을 댕갰어”
김화엽

 “아부지 얼굴을 못보고 살았제. 아부지 사진 한 장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아부지 얼굴을 몰르고 살아.”

 김화엽(75·해제면 만풍리 심양마을) 어매가 아직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고향이 보길도여. 어느 하래 조굿배를 타고 갔다가 풍랑에 배가 엎어져갖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어붓서. 그때 홀엄씨가 겁나게 나불었다더라고. 한 동네에 제삿날 똑같은 사람들이 많앴다그래.”

 어매가 세 살 때 친정어머니는 개가를 했다.

 “우리 언니랑 오빠는 큰께 할아부지 집에 놔두고 나는 째깐한 애기라 엄마가 나만 데꼬 개가를 했어. 밥이나 포로시 묵을 사람한테 육지로 시집갔어.”

“돈은 써보도 못함서 머슴각시라는 소리 듣고”

 커서 시집온 뒤에도 어매의 고생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팔남매 집에 싯째한테 시집왔어. 온께 암것도 없더라고.”

 시가집에서 일 년을 살다가 남의 집 작은방으로 제금날 때도 형편은 옹색했다.

 “오가리에 갓지 한나 담고 서숙 좁쌀에다 쌀 섞어진 것 서너 되나 갖고 놈의집 곁방살이를 시작했어. 그래갖고 이사를 몇 반디 댕갰냐문 일곱 번을 댕갰어.”

 “아들 둘 딸 둘 사남매는 줄렁줄렁인디 농토는 없고 애기들 믹이고 갈칠라고 머이든 다 이고 댕김시롱 폴았어. 목포가서 갈치도 받아다 팔고 도리포 가서 새우도 받아다 팔고. 저어그 지도로 가서 고기 다 폴고 나문 해제 올 차가 끊어져 불어. 캄캄해져갖고 오도가도 못하고 젊은 여자라 무섭기도 하고. 다라 들고 길에 서 있으문 차가 뒷빠쿠질해서 태와다 주기도 하고. 젓갈 폴고 비렁내는 폴폴 난디 미안시로왔제. 아저씨는 애기들을 학교를 보낸지 어짠지도 모르고 살았어. 아저씨가 정신차렸으문 해제면 부자 되어불었제.”

 남편은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중일꾼도 아니고 상일꾼이었제. 근디 밤이문 화토를 친가 머슴들하고 어울려 놀러댕긴가 세경 받은 그 돈을 다 없애묵고 집구석에는 일푼도 가져오는 법이 없었어. 집에는 납작보리에 쌀이 섞인 곡석 폴아주문 그것으로 끝이여. 남편이 벌어온 돈은 써보도 못하고 머슴각시라는 소리를 듣고 산께 속에서 열불이 났제. 아저씨가 엄청 사람 좋아. 해제면에서는 다 좋다그래. 놈 보증을 서갖고 자기 것을 다 날리고 댕개.”

 남편은 “일하문 일꾼이고 놀자글문 한량”이었다.

 “술 좋아하고 노래 좋아해서 노래가 있고 사람이 있는 곳이문 어디든 어울려 댕갰어. 남편 노래는 다 알아줬제. 생여(상여) 나가문 핑경 울림서 생여소리 매깁디여. 우리 아저씨가 기가 맥히게 잘했제.”

 “놈한테는 존디 나한테는 빵점”이었노라는 남편은 어매 속을 무던히도 태웠다.

 “한번은 장사를 갔다온께 애기들 학비할라고 푸대에 녹두를 한나 담아놨는디 밥할라고 본께 녹두가 푹 굴어불었어. 한 바가치도 더 넘게 퍼낸 흔적이여. 그래서 이상하다 그랬는디 뒷날 죽을 쑬라고 밀가리푸대를 연께 뭔 엿이 그 속에 한판 들었어. 엿이 못 녹으게 밀가리푸대에다 너논 것이여. 알고 본께 아저씨가 혼자 집에 있는디 엿장시 여자들 둘이 와서 사주라고 하다 졸랐등갑제. 주머니에 돈 없으문 말아불어야제 이날 평생 거절이라고는 못하는 아저씨가 녹두를 퍼내주고 엿을 사놨더라고. 뭔 인간이 집에서 이러코 지앙을 칠끄나, 묵고 살 것도 없는디 애기들 학비 댈 녹두를 폴아 엿을 사다니. 내가 어찌고 성질이 나갖고 얼매나 큰 엿판을 마당에 탁 날려때려분께 유리 깨지듯이 박살이 나불더만. 그러코 아저씨가 애를 녹여도 한번도 보따리 안싸봤어. 애기들을 어찌 놔뚜고 가겄소.”

“나는 당찬 사람이여. 안해본 장사가 없어”

 자식들을 키워낸 것은 어매의 ‘임질’이었다.

 “나는 당찬 사람이여. 안해본 장사가 없어. 그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끌었제. 꿀(굴) 젓 갈치 할 것없이 벨것을 다 폴고 댕갰어. 전장포 도리포 지도 같은 디서 나오는 송애젓 새우젓 받아다 폴고. 밴댕이젓이 송애젓이여. 여그서는 송애라그래. 그냥 송애는 덜 무거. 젓을 받으문 무거. 둘이 서이 떼매서 송애젓 다라를 나를 여줘. 그놈을 머리에 이고 천리길을 댕갰어. 지금은 골벵만 남았어. 지금은 한 바가치도 이기 싫어. 이기 무솨.”

 힘들었던 그 시절, 길 위에서 만난 할매가 해준 말을 어매는 잊지 못한다.

 “각시 때 갈치를 이고 어디 동네를 간께 이러코 젊은 여자가 이 무건 것을 이고댕기냐고 함서 어떤 할매가 갈치다라를 내려줌서 손금을 보자고 합디다. 그러더니 내 등거리를 또닥또닥함서 육십 넘어지문 만인간이 부러워하고 지붕 네 귀에 풍경(風磬) 달고 언제 내가 그러고 고생하고 살았냐고 말할 거라고 그럽디다. 그 생각 하문 지금도 눈물나. 그 할매가 영험하고 어쩌고가 문제가 아니라 젊은 각시한테 힘을 줄라고 해준 그 말이 그러코 따수왔어.”

 힘들 때마다 할매가 건네준 말을 맘속에서 꺼내보며 스스로를 또닥거렸다.

 “쉰 살 넘어서 밭을 포로시 샀어. 길갓밭 두 마지기 샀제. 아저씨는 그런 것도 못사놓고 나한테 물꾸럭밭을 샀다고 물난 밭을 사서 머더냐고, 물도 안난디 그러코 옹삭을 파고 그러대. 살림이라곤 일워준 것이 없어. 그뒤에 또 논 서마지기를 샀제. 할매 말대로 나는 인자 암것도 부런 것이 없어. 웃독빼서 아랫독 괴고, 아랫독 빼서 윗독 괴고 그러코 옹삭시롭게 살았는디 지금은 아그들도 다 착실하니 다 잘 살아.”

 남편은 놈의집살이 머슴을 하며 떠돌다 나이들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밖으로 떠돌다 놈의 보증을 서서 빚을 지고 집에 돌아왔어. 육십하나 묵은께 바늘귀만 한 속이 들더만. 남편이 애믹이문 그래도 괜찮애. 자식이 애믹이문 더 징해.”

 그 남편과 지금은 평화롭게 산다. 그 모든 것을 어매가 감당하고 품어왔기에 찾아온 오늘.

 “그나저나 이 양반이 왜 안온다냐.”

 갯바닥에 그물 걷으러 간 남편을 무담시 걱정하며 기다리는 오늘의 이 조그만 평화는 어매가 평생에 걸쳐 ‘애 녹이며’ 이뤄낸 것.
어매가 쓴 글처럼 “허만 세월이 오십 년 지나고 지금은 아들딸 사남매 나서 대학 공부 식키고 다 자기집 사서 잘 살고 있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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