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고전을 만나다]강은교 ‘숲’ & 김만중 ‘홍길동’

박혜진 | 2018-07-09 0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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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결정하는 순간 시작된다.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 강은교 ‘숲’

허균의 홍길동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
 
 최초의 한글소설이라 칭해지는 ‘홍길동전’은 한 소년의 성장담이자 영웅소설이다. 성장소설의 클리셰가 그렇듯 길동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외부적 조건에 의해 시련이 예고되어 있다.

그 시련이란 조선양반의 취첩(取妾)을 허용하는 제도에서 기인한다. 가문이 인정한 정실부인 외에 다른 부인을 배우자로 맞아들일 수 있는 것이 취첩이다.

제도는 양반의 배우자들은 인정하되, 그 부인들이 낳은 자식들은 철저하게 분리, 배척하는 것으로 기득권의 확대를 막았다. 아버지 홍판서와 어머니이자 노비인 춘삼에게서 태어난 홍길동의 설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서얼은 쌓은 실력과 재주가 뛰어나도 과거를 볼 수 없다. 아비의 작은 배려로 스승을 만나 세상 공부를 할 수는 있으나 배운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인 과거시험에서는 배제되었다.

개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수를 움직일 수 있는 힘과 지위가 필요하다. 그 지위와 힘을 갖기 위한 1차 관문이 조선의 과거. 정신과 이상은 높되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가 아예 막힐 때, 사람은 안으로 분열하거나 밖으로 폭주한다. 홍길동전이 태어난 시대적 배경이 그리하였다.

 홍길동전은 조선 중기 광해군 대의 명망가였던 허균이 썼다고 전해진다. 허균은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알린 허난설헌의 동생이다.
홍길동전. 창비.

아버지와 형이 중요 요직을 맡아보고 성리학 신동으로 기대를 받았음에도 자랄수록 허균은 당대의 지식인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에게 학문은 조선이 인정한 유학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학문인 불교와 도교, 청으로부터 유입된 현대의 학문인 천주교 등에도 호기심이 가닿는 분야라면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이는 학문에만 국한되지 않아 뭇 양반들이 천하다고 비난하는 기생과 서얼, 저잣거리의 장사치 등 시정잡배라 불리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허균이 스승으로 삼은 이달도 서얼이었다. 그가 만나본 사대부 계층 바깥의 사람들은, 그릇된 제도로 인해 능력을 펴지 못하는 숨은 달인이자 인재들이었다. 허균은 인재를 등용하는 동서고금의 방식이 본디 개방적이었음을 설파한 글을 써서 신분에 따른 차별이 시대착오적임을 밝힌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해주지만은 않는다.

옛날부터 선철(先哲)들은 명확히 그런 줄은 알아서 혹은 초야(草野)에서 인재를 구했으며, 혹은 병사들의 대열에서 뽑아냈고, 혹은 패전하여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혹은 도둑의 무리에서 고르며, 혹은 창고지기를 등용하였다….
 - 허균, 유재론
  
 ▲앞으로 올 세상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이제 그의 별명은 ‘천지간의 괴물’이 되었다. 권력의 본성은 다수가 소수에게 권한을 위임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그 권력은 다수에게서 소수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도치가 일어난다. 권력을 부여받은 자는 그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하는 ‘법’을 제정하고야 만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애초에 권력의 주인이었던 다수는 피지배자로 전락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법에는 기묘한 후광이 드리워진다.

본디 규칙이란 그 규칙이 실효성을 잃으면 바뀌거나 사라져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 여러 세대를 지나면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양 인식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에는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뇌 작용의 효율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사회적 습관인 ‘관습’에서부터 개인적 ‘습관’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왜 하루에 세끼를 먹는가, 왜 학교는 여덟시 삽 십 분까지 가는가, 왜 일이 놀이보다 중요한가.
신윤복 단오풍정.

 공고하게 쌓아올린 규칙들은 규칙 바깥의 타자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 규칙들의 근거는 생각만큼 공고하지 않다. 허균은 당연하다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들을 향해 왜 꼭 그래야하는지 되물었다.

그리고 의문들에 두려움을 느낀 시대는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광해군6년 ‘신분제를 넘어선 관직 등용’이라는 슬로건 아래 모인 ‘일곱 서얼의 난’에 연루되어 위기에 처했던 허균은 광해군10년(1618년) 역모혐의로 사형 당한다. 양반들이 ‘천지간의 괴물’이라 칭했던 한 남자의 말로였다.

 앞으로 올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미친 거요?

 “길을 가다 큰 돌을 만나면 약한 사람들은 그것을 걸림돌이라 말하고 강한 사람들은 그것을 디딤돌이라 말한다”고 로버트 칼라일은 말했다.

태어난 환경이 제시하는 길이 아닌 스스로 판단한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걸림돌은 없다. 그의 죽음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하지 말라. 첫 번째 목숨의 위기를 불러온 ‘일곱 서얼의 난’은 허균에게 홍길동전의 모티브를 주었고, 때 이른 죽음도 그의 불멸성에 흠집을 내지는 못하였다.

사람은 살아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회자될 홍길동은 여러모로 허균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사내로 태어났사오니 어찌 이만한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서러운 것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못하니 위아래 노비와 친척일가들이 손으로 가리켜 아무의 천생(賤生)이라 이르오니 이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통곡하니 홍판서 꾸짖어 말하되 “재상의 첩이나 종의 소생이 너뿐 아니거늘 조그만 아이가 어찌 이리 무례하고 버릇이 없단 말이냐! 다시 또 그런 말을 하면 내 다시는 너를 보지 않으리라.” - 홍길동전
신윤복 주유청강.
  
 ▲상상은 현실보다 힘이 세다
 
 그 길로 집을 나온 길동은 도적무리인 활빈당의 두목이 되어 부정한 행위로 재물을 축적한 탐관오리 및 절의 재물을 훔쳐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활동을 벌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양반을 약 올리는 홍길동의 행적은 당시 백성들의 마음에 있던 해묵은 체증을 내려가게 해주었을 것이다.

서얼이라는 개인의 아픔을 또 다른 권력의 추구로 풀지 않고,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에서 찾은 홍길동은 허균의 소설 속 자아였다. 그러나 허균의 한계가 곧 홍길동의 한계이며 시대의 한계. 소설은 당대 문화의 반영이며 동시에 동시대 사람들의 바람의 반영이다.

소설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품는다. 분신술과 둔갑술, 축지법을 행하며 바람과 구름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두려울 것 없던 사내도 조정이 홍길동 대신 아버지를 잡아들이자 활빈당을 해산하고 투항한다.

그리고 도적의 무리를 거두어 섬나라인 안남국을 세운 후 선정을 펼치다 신선이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니 너 또한 그러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제 길을 개척했던 한 소년이, 나이 들어 다시 그가 몸담았던 사회의 구조를 답습하는 끝을 보는 일은 참으로 묘하다.

율도국에서 길동은 두 아내와 결혼하며, 그 사회 또한 신분제로 유지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김홍도 씨름.
 
다만 왕이 된 길동은 백성을 두루 살피고 두 아내와 그에게서 낳은 자식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세습군주제와 취첩제라는 틀을 대신할 대안은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마련되었다.

 내가 홍길동으로부터 배운 점은 이것이다. ‘상상은 현실보다 힘이 세다’ 이 말을 아인슈타인이 했던 말로 살짝 비틀어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지식은 현재가 인정하는, 현실화된 상상에 다름 아니다. 지식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상상, 그럼에도 지식의 기원이 상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아이들은 책을 읽고 홍길동의 자유자재한 도술을 가장 부러워했다. 그러나 만약 17세기 인들이 현재로 온다면 도리어 기절초풍하지 않을까?

그들이 보는 도시 전체가 마법이며 도술일 것이므로. 바다 위를 날고 광주에서 서울까지 90분에 주파하는 것이 축지술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가뭄지역에 인공강우 로켓을 쏴서 비를 내리게 하고 인공지능을 이용한 빅데이터와 증강현실이 해리포터의 세상을 구현하는 세상에서 소설과 사실을 구분하는 건 이미 의미가 없다. 그러니 아이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라.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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