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갈피갈피]일제강점기의 열차 통학

조광철 | 2018-06-27 0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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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보생 400명 중 70명이 통학
하숙비 부담…장성·함평까지 통학권

 광주가 교육도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920년대부터다. 특히 이는 중등학교가 많이 설립된 영향인데 1920년대 광주에 생긴 중등학교만 광주고보(광주고등보통학교의 줄임말로 현 광주일고의 전신), 광주중(광주중학교, 광주고의 전신), 광주고녀(광주고등여학교, 광주여고의 전신), 광주고보녀(광주고등보통여학교, 전남여고의 전신), 도립사범(도립사범학교, 1930년 폐교) 등 5개교가 됐다. 그 이전부터 운영 중이던 농업학교(현 자연과학고의 전신)까지 합하면 20년대에 6개교가 있었다. 여기에 재학 중인 중등학교 학생들만 1300명 남짓 됐다.

 당시 인구 면에서 광주보다 많았던 목포에 중등학교가 목포고녀(목포고등여학교, 현 목포여중의 전신)와 상업학교(목상고의 전신) 2개교에 불과했고 학생 수가 1000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교육도시 광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도시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순천이나 강진, 제주(당시엔 전남에 속했다)의 농업학교, 여수의 수산학교처럼 중등학교라야 한 개 있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1920년 광주 6개교…목포엔 2개교
 
 인구 수만에 불과한 당시의 광주에 무려 6개의 학교가 세워진 데에는 광주가 전남도청 소재지였다는 정치적 위상이 큰 작용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학교들이 학생들을 충원할 수 있었던 데에 철도의 존재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실제로 전남지역의 많은 학생들이 이 무렵 광주 소재의 중등학교에 다녔다. 그런 중등학교 중 일부, 이를테면 광주중, 농업학교, 도립사범, 광주고녀와 같은 곳은 기숙사를 운영해 학생들이 집을 떠나 교내 안팎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교내 안’이 아니라 ‘교내 안팎’이라고 표현한 것은 도립사범의 경우에 학교는 지금의 동명동 중앙도서관 자리에 있었지만 기숙사는 옛 전남도청 맞은편 금남로1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기숙사가 재학생 모두를 수용할 수는 없었고 아예 기숙사가 없는 학교의 학생들은 하숙이나 통학을 해야 했다. 이런 학생들의 대다수는 하숙생이었고 하숙집은 개인집이나 여관을 이용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밑거름 역할을 하는 ‘성진회’라는 단체의 구성원 16명을 봐도 상당수가 당시에 하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숙은 비용 부담이 컸다. 당시 하숙비가 얼마였는지에 대한 자료를 찾지는 못했으나 하숙비에 대한 부담이 컸던 정황은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비싼 하숙비 때문에 상당수 학생들은 원거리 통학을 했다. 통학권은 시기마다 조금씩 달랐다. 대체로 광주 북쪽으로는 장성, 남쪽으로는 함평까지 포함됐던 것 같다. 문제는 이들 지역에서 매일 학교를 오가는데 철도가 없었다면 통학 자체를 꿈도 꿀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열차통학에 대한 자료는 1930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펴낸 ‘전라남도 광주에 있어 내선인(內鮮人) 생도투쟁사건의 진상과 그것이 조선 내 여러 학교에 미친 영향’이란 자료에 보인다. 이 자료엔 한국인 학생들이 다니던 광주고보 재학생 400명 중 70명, 일본인 학생들이 주로 다니던 광주중 재학생 400명 중 100명이 열차통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무렵 광주시내 소재 6개의 중등학교 재학생이 얼추 1300명이었으므로 열차통학생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전체 중등학생 중 20%가 열차통학을 했다고 가정하면 하루 260명에 열차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를 연간 인원으로 따지면 어떨까? 일제강점기 중등학교의 수업일수는 연간 200일이었다. 여기에 당시 하루 열차통학생 추정치인 260명을 곱하면 연간 5만2000명이 열차통학을 했다는 말이 된다.
 
▲전체 9%에 해당…지금의 명문대생 위상
 
 또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1929년 광주역에서 오르내리는 승객은 57만 명이었으므로 광주역 이용자의 9% 가량이 학생들이었던 셈이다. 9%는 많은 숫자일까, 아니면 적은 숫자일까? 9%에는 많은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확실히 9%는 매우 적은 숫자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만 나와도 면서기를 거뜬히 할 수 있던 시대였다. 하물며 중등학교를 다닌다는 건 대단한 특권이었다. 당시 중등학교재학생은 오늘날 학력 인플레가 심한 시기와 비교하자면 단순히 4년제 대학 정도가 아니라 명문대에 다니는 정도의 위상을 지녔다.

 비록 하숙비 부담 때문에 열차통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만 열차통학이 반드시 가난을 의미했던 것도 아니었다. 우선 일부 학생들은 집이 부자임에도 열차통학을 했다. 나주군수를 지낸 아버지를 둔 김보섭이 이런 경우다. 또한 열차통학생들은 매일 집과 역을 오가면서 수많은 비슷한 또래의 소작농 자녀들과 눈길을 마주쳤다. 누렇게 뜬 무명 저고리와 바지 차림이 그들에게 중등학생들의 검은 색 교복은 어떤 빛깔로 보였을까?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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