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삶]대관령에서 만난 오대산 호랑이

최종욱 | 2018-07-09 0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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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5000년을 산 백두산 호랑이<1>
▲3시간 동안 이어진 호랑이의 긴 이야기

 1990년대 어느 날, 나는 당시 대관령 목장에서 수의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일이 끝나면 매일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었다. 그 날은 대관령 주변에 대설주의보가 내릴 만큼 눈이 많이 온 날 이었다. 난 일을 끝낸 후 변함없이 진도개 ‘어리와 버리’를 데리고 두터운 눈 장화를 신고서 산책길에 올랐다. 한참 산책 도중에 갑자기 우리 앞에 열 마리쯤 되는 멧돼지 한 무리가 언덕을 넘는 걸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혹시 그들에게 공격당할까 두려워서 바짝 엎드려 있었지만, 멧돼지를 생전 처음 본 철부지 개들은 말릴 새도 없이 그들을 쫓아 언덕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역시 진도개들의 사냥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숫자로 보나 덩치로 보나 두 마리의 개들은 처음부터 멧돼지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괜히 건드려 나까지 공격당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바람처럼 나타나더니 그 중 가장 큰 멧돼지 한 마리를 물고 늘어졌다. 멧돼지들은 아마도 바로 이 호랑이에게 쫓겨서 오대산에서 이곳 허허벌판 대관령까지 온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에 호랑이가 다 나타나다니!’ 그 상황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황당하게만 느껴져 도대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는 거의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저 멍하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멧돼지를 해치운 호랑이는 서서히 개들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우리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개들도 호랑이의 기세에 눌려 꼬리를 내린 채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차라리 난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리고 조금 후에 바로 눈앞에서 호랑이의 따뜻한 콧김이 느껴졌다. 곧이어 약간은 강원도 사투리가 섞인 부드러운 남자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니 눈을 떠봐.” 무슨 일인가 싶어 서서히 눈을 뜨자, 내 앞의 좀 떨어진 곳에서 그 커다란 호랑이가 뒷다리는 굽히고 앞다리는 올린 채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난 저기 오대산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늙은 호랑이인데, 그저 너와 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 전혀 해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렴. 멧돼지는 그저 먹이였을 뿐이야. 배고파서 쫓아오다보니 우연히 여기까지 와 버렸구나.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테니 괜찮다면 내 이야기나 한번 들어줄래?” 난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더 달아날 용기도 물론 없었다. 그렇게 해서 호랑이의 긴 이야기는 그 후 세 시간 동안이나 쭉 이어졌다.
 
▲단군신화의 진실을 들려줄게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 알지? 그 곳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한 가지 숨어 있지. 원래 알려진 신화는 ‘곰과 호랑이가 환웅님 앞에 나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고 환웅님도 때마침 배필이 없던 차에 잘 됐다 싶어 그 제안을 선뜻 받아 들였지. 그리고 각자에게 마늘 한 단과 쑥 한 단을 주면서 동굴 속에 들어가 100일을 버티고 나오면 사람이 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지. 호랑이는 급한 성격 탓에 3일도 못가서 뛰쳐나와 버리고 곰은 끝까지 버텨 100일을 다 채우고 나와 아름다운 여인으로 환생해 환웅님과 결혼하여 단군님을 낳으셨다는 게 주 내용이야.

 그러나 그 당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동물이 어디 곰과 호랑이 뿐이었겠니. 그 소문을 듣자 여우, 늑대, 표범부터 독수리나 구렁이까지도 환웅님 앞으로 모두 몰려들었지. 그러나 환웅님이 기준을 자기와 몸짓이 비슷하고 모든 동물의 우두머리 격이며, 땅을 딛고 걷는 동물로 한정시킨 탓에 최종적으로 나와 곰만 남게 된 거지. 그러나 환웅님의 본래 뜻은 사실 곰이 선택되기를 내심 바랐던 거였어. 곰이 체구도 알맞고 성격도 느긋하며 더구나 두발로 걷고 뛸 수 있으니 인간으로 환생하기에 제격이었던 셈이지. 난 괜히 정해진 연극에 들러리가 돼버린 꼴이었지. 그래서 일부러 시험도 곰에게 절대 유리한 종목으로 내 놓으신 거야. 마침 곰이 겨울잠에 들어야 하는 시기라 맛없는 쑥과 마늘은 아예 제쳐두고 곰은 첫날부터 100일 때까지 줄곧 잠만 잤거든. 난 첫날부터 이미 눈치 채 버렸지. 이 시합은 반칙이라는 걸. 그리고 둘째 날 잠자는 곰을 놔두고 동굴을 뛰쳐나가 환웅님한테 곧바로 따지러 달려갔어. “환웅님 이건 너무 불공평한 시합 아닙니까? 곰은 초식동물인데다 100일 동안 겨울잠을 자는 동물인데, 저하고 어떻게 그런 불공평한 내용으로 함께 시합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모든 동물들을 불러서 이 사실을 낱낱이 공표하겠습니다!” 하니까 환웅님도 안색이 변하시더니 조용히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그럼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자네는 기껏해야 20년 밖에 못사니 내 수명의 10배를 늘려 주면.” “에게! 겨우 200년이요? 안됩니다.” “그런 100배는 아니 아예 5000년을 주면 어떻겠나? 게다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까지 보태 주지.” 솔직히 내겐 솔깃한 제안이었지. 곰곰이 생각하다. “그럼 뭐 그렇게 하지요.” 해 버렸지. “대신 이 건 우리 둘만이 평생 간직할 비밀이라고 맹세하게.” 이렇게 해서 난 도중에 큰 사고만 없다면 5000년을 살고 사람 말을 알아듣는 지구상에 유일한 호랑이가 된 거야. 이제 나도 죽을 때가 가까이 와서야 겨우 사람 말까지 조금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어. 그래서 너에게 맨 처음으로 말을 거는 거야. 이제 나도 나이가 거의 5000살이 다 되어 가니 누군가에게라도 꼭 이 사실을 남겨 두고 싶어졌었어. (2편에 계속)
최종욱 <우치동물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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