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가족 빼앗긴 한 “이제는 풀어달라”

강경남 kkn@gjdream.com | 2020-01-1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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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집단소송 원고들의 눈물 어린 호소
“아버지 얼굴도 몰라, 가족들도 오랜 세월 고통”

“일본이란 글자만 봐도 싫어질 때가 있어요. 그 정도로 아버지가 당한 고통은 우리 가족 모두의 한이 됐습니다. 이 한을 좀 풀어달라는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14일 오전 광주지방변호사회관 6층에서 열린 일제 강제동원 2차 집단소송 제기 기자회견에서 참석한 원고 김승익 씨의 하소연이다.

김 씨는 1945년 2월 일본 효고현 고베시 가와사키차량주식회사(현 가와사키중공업)로 강제동원된 고 김상기 씨의 유족(아들)이다.

김상기 씨는 일제강점기 말 기관차와 전쟁무기를 제조하는 공장에서 노역을 착취당했다. 이뿐 아니라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 했다.

이는 해방 후에도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는데, 김상기 씨는 이 억울함을 풀고자 어떻게 일본에 끌려갔고, 그곳에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비롯해 가와사키차량주식회사의 상세한 주소 등을 경위서에 정확히 기록해 놨다.

2015년 세상을 떠나면서는 가족들에게 “(내가)죽어서라도 한을 풀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승익 씨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 소송에 참여했다. 가와사키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김 씨 한 명뿐이지만 그는 “이번에 반드시 일본의 사죄를 받고 싶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는 “아버지는 18살이란 젊은 나이에 일본에 끌려가 청춘을 빼앗기고 상처로 얼룩진 세월을 보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 한을 풀까를 생각하며 때론 일본 제품만 봐도 싫고, ‘일본’ 글자도 보기 싫을 때가 있었다”며 “우리나라, 한국이 보기 싫은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글(경위서)을 설명하면서 “이 한들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일제 강제 징용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를 남긴 고 이상업 시의 유족 이선희 씨도 참석했다. 고 이상업 씨는 16살이던 1943년 11월 후쿠오카현 미쓰비시광업 가미야마다 탄광에 끌려가 지하 1500m 막장에서 하루 15시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지옥 같은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린 것도 모자라 탄광 일로 진폐증이 생기기도 했다.

이상업 씨는 결국 탈출을 결심하고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 세 번째 만에 탈출에 성공해 고향에 돌아왔다.

일제 강제 징용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를 남긴 고 이상업 씨의 아들 이선희 씨가 14일 일제 강제동원 2차 집단소송 제기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던 중 복받치는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이선희 씨는 이날 아버지가 남긴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 책을 내보이며 “아버지는 일본에 끌려갈 때도 화물열차 칸에서 먹을 것도 없이 이틀을 굶었다”며 “그렇게 일본에 건너가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말을 듣고 저희 가족들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며 복받치는 슬픔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린 그는 “이렇게 고생하셔서 이런 자리까지 왔는데 좀더 합심해 승리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미쓰이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고 이제훈 씨의 유족 이길자 씨는 “저희 아버지도 저를 낳아 놓고 3일 만에 일본으로 끌려가셨다”며 “그런데 여기 저기서 밥줄이 끊어져 배고픔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탄광에서 일하시다 옆구리와 발목을 다쳤고, 해방 후에도 밥줄이 끊어져 감자를 캐서 잡수고, 풀을 쪄서 잡수시다 그해 9월 달에 고향으로 오셨다”며 “이후에도 심한 후유증을 겪으셨다”고 말했다.
일제 강제동원 2차 집단소송에 참여한 피해 원고들.

미쓰비시광업 강제동원 피해자 고 윤재찬 씨의 유족도 참석했다. 윤재찬 씨는 1942년 8월경 일본 후쿠오카현 미쓰비시광업으로 끌려가 철조망에 둘러싸인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식사도 작은 주먹밥이 전부여서 배가 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고, 반항하거나 도망치면 무지막지한 구타가 가해졌다. 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오직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생각만으로 3년을 견딘 그는 갱도 내 작업 시 구루마 추돌로 양다리와 발목, 무릎 등에 부상을 입어 귀환 후에도 흉터와 통증으로 고생했다. 일본말을 잘 못 듣는다고 귀를 자주 맞아 귀에 염증이 생겨 난청을 겪기도 했다.

“월 150엔을 준다. (노임을)모두 우체국에 예치한다”며 그에게 도장 1개를 파줬으나 실제 그는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 도장은 지난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됐다.

윤재찬 씨의 유족 박윤자 씨(며느리)는 “시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들을 앉혀 놓고 그때의 아픔을 말하시며 ‘한을 풀고 가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일제 강제동원 2차 집단소송에 참여한 피해 원고들.

훗카이도탄광기선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사망한 고 하태봉 씨의 유족 하부조 씨는 “저는 세 살, 제 여동생은 한 살 때 아버지가 일본에 끌려가셨고, 1년 후 돌아가셨다는 편지가 왔다”며 “어려서 아무 것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평생을 고아로 살아왔다”고 밝혔다.

하 씨는 “82년을 살면서 객지를 떠돌아다니기도 했다”며 “그렇게 살다보니 부모가 있는 분들을 보며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지내왔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의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우리도 고통스럽게 살았던 것”이라며 “이에 대해 꼭 사과라도 받고 싶다. 정부에게도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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