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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의 무대읽기]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임유진 | 2018-06-11 0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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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어쩌면 그래서 더 따뜻한 가족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것

 5월에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라는 연극을 보러 갔다가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다. 시간도 맞지 않았고 이러저러한 사정들이 겹쳐서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극단 청춘’에서 6월에 그 공연을 올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 8일 금요일 밤, 예술극장 ‘통’을 찾아갔다. 전에 한 번 연극하는 후배랑 찾아간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찾지 못해 일대를 헤맸다. 공연 시간은 다가오고 또 놓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엄습하는 가운데 얼른 핸드폰 와이파이를 켰다.

친절한 ‘네이버’(?) 씨에게 문의했더니 다행히 한 블로거가 극장 전화번호를 올려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밤 8시 공연인데 2분 전에 극장에 도착했다.

 어떤 공연이든지 정보 없이 가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하지만 제목에 아버지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냥 그런 연극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냥 그런 연극’은 대체 뭐냐?) 그러면서 혹시 관객은 나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위험한 생각도 했다. 나만을 위해서 공연하는 극단. 좀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지하에 있는 극장에 들어섰는데 나를 비웃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사람들이 줄지어서 표를 구입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극장에 관객들이 꽉 차 있었다.
 
▲출세한 아들, 평범한 아들, 진짜 가족은?
 
 무대는 회색빛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골집이었다. 무대 앞 오른쪽에 나무로 된 평상이 하나 놓여 있고, 왼쪽 구석에는 수돗가가 있다. 관객들이 출입하는 통로에는 대문이 달려 있다. 그러니 관객들은 일단 들어서면 그 집 안에서 인물들과 함께 숨 쉬어야 한다. 문이 많다. 오른쪽에 대문부터 시작해서 뒷간(화장실)문, 그리고 또 다른 문까지 세 개. 왼쪽에도 세 개의 문이 있다.

무대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친 공간에 방이 하나 있는 설정인데, 여기에도 드나드는 문이 있고, 쪽창도 있다. 창까지 해서 모두 여덟 개의 문. 이 연극은 ‘소통’이 주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언뜻 해본다. 그 중에서도 화해로운 소통 말이다. 물론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서 그 문들이 닫힌 채로 열리지 않는다면 분위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마루에는 낡은 가죽가방이 하나 있다. 저 가방 주인은 누구일까. 어두워졌다가 불이 들어오자 내 궁금증에 바로 대답이 나온다. 가방 주인은 나(동하)다. 형제 중 둘째 아들이고 간암 판정 받은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집에 내려온 인물이다. 그런데 내레이션을 한다. 딱히 독백(무대에서 혼자 하는 대사)도 방백(무대에서 다른 배우들은 듣지 않는 걸로 하고 관객에게 하는 대사)도 아닌 해설로 극이 시작된다. 대사는 약간 시적이다. 전채요리를 먹은 것처럼 가벼운 흥미가 생겼다.

 동하는 형과 자신을 비교한다. 형 동춘은 명문대(서울대)를 나왔고 외국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당연히 어머니 아버지의 보람이자 자랑이며 기쁨이다. 그에 비해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보잘 것 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동하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된 것과 부모님의 편애에 대해 불만과 원망이 많다. 불만과 원망은 어머니에게도 있다. 평생 살갑지 않았던 남편과 고생하며 두 아들을 키워 온 어머니는 이제 남편에게 정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집에서는 거두기 힘든 지경까지 간 남편을 끝까지 집에서 보살피고자 한다.

 이 연극의 소재는 어쩌면 진부하다. 가족 이야기이고,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며 화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장 진부하고 단순한 것이 늘 진리를 말한다. 부모에게 입신양명을 이룬 자식은 큰 보람이자 자랑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함께 한다는 것일 것이다. 자식이 건강하고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것. 아픔도 고통도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사람이 사는 방법이다. 큰 아들 동춘은 출세했지만 멀리 외국에 있다. 결국 부모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다. 동하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그래서 이 연극에 동춘은 등장하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무대, 삶이라는 무대에는 늘 평범하고 (어쩌면 진부한) 인물들만 등장한다. 그들이야말로 인간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중심인물이다.
 
▲“넌 괜찮냐?” 투병중인 아버지가 묻다
 
 동하가 아버지를 업고 홍매가 있는 마당을 거니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동하는 아버지랑 화해했다. 아버지와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따뜻한 추억을 만들었다. 간성 혼수에 시달리는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넌 괜찮냐?”라고 물을 때 가슴에 진통을 느꼈다.

그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아버지는 평생을 자식이 괜찮은지 궁금해 하면서 살고 있다. 자식이 괜찮기를 자식만은 괜찮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다. 난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쳐야 했다. 나와 달리 대부분의 관객들은 소리 내어 훌쩍였다. 그 동안 본 연극들이 제 4의 벽을 깨고 관객과 직접 소통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는 전통 리얼리즘 연극의 요소가 강했다. 관객들은 완전히 몰입한 상태로 그 가족의 이야기를 보았다.

 연극을 보면서 일본 작가 마쓰다 마사타카의 희곡 ‘바다와 양산’을 떠올렸다. 죽어가는 배우자와의 일상을 담담하고 단아하게 그려낸 명작이다.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는 한국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또 다른 ‘바다와 양산’ 같은 느낌을 주었다. 또 영화 ‘스틸 앨리스’도 생각났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삶이 파괴되어 가는 엄마(줄리안 무어) 곁을 지키는 건 세 자식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 막내딸(크리스틴 스튜어트)이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함일지 모른다. 함께 밥 먹고 사소한 일에 웃고 서로 안아주고 눈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살다가 따뜻하게 이별하는 것. 안타깝게도 연극은 6월 9일에 끝났다.

하지만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언제든 이 공연을 찾아보고 가슴에 차오르는 따뜻함을 느낀다면 내 소임을 다한 것일 게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붙이자면 이 연극에서 문들은 수시로 열리고 닫혔다. 배우들은 계속 안과 밖을 드나든다. 그들은 머물지 않고 다가왔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이 연극은 제목에 ‘아버지’가 들어갔다고 해서 ‘그냥 그런 연극’은 아니었던 셈이다. 편견은 위험하지만 편견이 뒤집히면 카타르시스가 있다.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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